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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새빌 로: 체스터 배리(Chester Barrie)

Photography: Jonathan Daniel Pryce


새빌 로 19번지의 윈도우 디스플레이를 언뜻 보면 60년대의 남성 패션의 피콕 혁명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1960년대 후반에 나온 롤링 스톤스나 비틀즈의 히트곡이 종일 귓가에 맴돌지도 모르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2011년, 새빌 로를 혁명하는 과정에서 체스터 배리에 전설적인 재단사이자 디자이너, 테일러인 에드워드 섹스톤을 고문으로 불러왔기 때문이죠. 에드워드는 사업 파트너인 토미 너터와 60년대에 로큰롤 대스타들의 의상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체스터 배리의 MTM(made to measure)과 기성복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죠.

체스터 배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퍼 모두. 

“비유하자면 체스터 배리의 수트를 골격만 남긴 후 한 겹, 한 겹 다시 만들어 나갔습니다.”라고 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퍼 모두가 설명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본인도 초창기에는 아버지의 ‘노팅 힐 모드’ 패션 스타일에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60년대 감성에는 상당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죠.  “로프드 숄더, 강조한 체스트, 자연스러운 라펠이 전체적인 인상을 만듭니다. 거기에 안쪽의 포켓이 조금 올라가 있는 등 세부적인 부분이 가치를 더하죠. 멋지게 수트를 맞춰 입고 지갑을 주머니 안에 넣었더니 앞으로 뚝 떨어지는 걸 상상해보면 짜증 나지 않나요? 저희는 에드워드를 그냥 이름값이나 하라고 불러온 게 아닙니다. 에드워드는 확실한 힘이 되어주고 있죠.”

섹스톤은 영국 테일러링의 대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접근 방식은 체스터 배리라는 합성어에서 오는 본연적인 영국 느낌을 생각나게 하죠. 체스터 배리의 설립자 사이먼 아커만은 더 폰드에서 체스터 배리의 원조격인 남성복점 체인을 열어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그 후 1935년 영국으로 돌아와 크루에 공장을 차렸는데, 크루는 허더필드 공장과 가까운 데다 미국으로 가는 상업적 관문 역할을 할 리버풀 항구와도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체스터는 그 옆에 있는 도시였고, ‘배리는 피터의 작가 JM 배리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커만은 두 이름 모두가 듣기 좋은 잉글랜드 단어라고 생각했죠(사실 후자는 스코틀랜드어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아커만의 아들 마이런이 체스터 배리를 세계적으로 성공시켰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명망 높은 새빌 로에서 체스터 배리의 수트가 너무나도 잘 팔리는 바람에 크루에서 제조 직원이 1,000명 이상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영화007 살인번호의 션 코너리, 영화 토마스크라운어페어의 스티브 맥퀸도 체스터 배리의 수트를 입었죠. 그 후 체스터 배리는 시련도 겪고 소유주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유럽의 유명세와 일본 대기업 이토추를 등에 업고 다시 한번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섹스톤의 역할은 분명 값진 것이지만, 브랜드를 새로운 길로 이끌고 있는 건 크리스토퍼 모두입니다. 모두는 새빌 로 40번지에 위치한 토마스 핑크(Thomas Pink)에서 일하며 정장 사업에 대해 배웠고, 이드 & 레이븐스크로프트(Ede & Ravenscroft)에서 일하기도 했죠.  “저희의 키워드는 접근성입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저희는 비스포크 수트도 판매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기성복 전문입니다. 더 많은 고객에게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죠. 저희 제품의 가격대는 평균적인 비스포크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큰 맘 먹고 구매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 제품은 시간을 오래 들여 옷을 고를 여유가 없는 고객분들에게도 매력적이죠. 고객분들이 저희 제품을 사주시는 건 그 핏, 형태, 감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주문한 의상이 완성되는 데 4주에서 6주밖에 걸리지 않으며, 피팅도 한두 번이면 된다는 점은 확실히 시간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매력적입니다.

“로프드 숄더, 강조한 체스트, 자연스러운 라펠이 전체적인 인상을 만듭니다. ”

크리스토퍼는 소재에 있어서는 정말 열광적입니다. 펠트, 소모사, 기타 온갖 종류의 울로 만들어진 작은 샘플들을 거대한 화이트보드에 붙여 놓고 메모를 휘갈기곤 하죠. “원단은 제 디자인 과정 전체를 주도합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전 패션 대학에 다니지도 않았고, 디자인을 배우지도 않았고, 그림도 못 그리고, 핑킹 가위도 쓸 줄 모릅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건 마음을 열고 비탈레 바르베리스 카노니코(Vitale Barberis Canonico), 윌리엄 할스테드(William Halstead), 로로 피아나(Loro Piana ) 등 좋은 원단 공장에 들르는 거죠. 거기서 새로운 컬렉션을 전부 둘러보면서 원단을 실제로 들고 느껴본 후 어떻게 할지 결정합니다.”

그는 기성복 컬렉션을 제작하기 때문에 원단 회사와 더 활발한 관계를 맺고, 새빌 로의 다른 곳보다 다양한 소재를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메리노 울은 본능적으로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그의 작업 방식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성 있는 소재가 좋습니다. 메리노가 바로 그렇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고품질에 부드럽고 재단하기도 쉬운 다른 원단도 많지만, 그 결과는 공항 유니폼입니다. 심심하다는 뜻이죠. 개성도 없고요. 새빌 로 품질을 가진 수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일반 시내 옷가게 스타일의 소재를 쓸 필요는 없잖아요?”

체스터 배리는 새로운 활력을 얻은 디자인 외에도 사업 협력 관계를 빠르게 넓히고 있습니다. 체스터 배리는 2011년, 런던 극장의 아카데미 시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리비에 시상식의 의상 스폰서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레드 카펫 전체의 의상을 맡았습니다.”라고 모두가 설명했습니다. “사회자의 의상과 배우 4~5명의 야회복을 작업했죠. 최근 4,5년 사이에 레드 카펫 위 남성 의상이 언론의 주목을 훨씬 많이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도 그에 맞춰 더 대담해지기 시작했죠. 덕분에 저도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어서 색상과 형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습니다. 즐겁게 작업하다 보니 브라운과 레드컬러의 디너 수트와 칵테일 수트가 완성됐죠. 평소보다 훨씬 화려했어요.”

또 다른 사업 협력 관계는 하우스의 테일러링 테크닉을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희는 이번에 레스터 타이거스(Leicester Tiger)의 남성복 공급업체가 됐습니다.”라고 모두가 밝혔습니다. “특이한 체형을 가진 남자 50명을 제대로 입힐 수 있다는 건...예를 들어 다치기라도 하면 체형이 피팅과 피팅 사이에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허리 둘레가 30cm는 바뀔 수 있죠. 게다가 선수들은 목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있죠. 턱과 가슴 사이엔 근육뿐이죠. 그러니 이제 어깨가 처진 고객이나 배가 약간 나온 고객에게 ‘이런 사람에 맞는 수트도 만들어 봤습니다’ 하고 운을 띄울 수 있죠.”

“최근 5년 사이에 레드 카펫 위 남성 의상이 언론의 주목을 훨씬 많이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도 그에 맞춰 더 대담해지기 시작했죠.”


19번지를 정기적으로 찾는 유명 인사 중 좀 더 재단하기 쉬운 체형을 가진 사람에는 데이비드 간디 같은 모델과 데이비드 헤어우드, 휴 보니빌, 마크 개티스 같은 다양한 배우가 있습니다. 창의적인 재능, 기술적 기량, 남성복의 기본이 뭔지 보여주는 체스터 배리의 미래는 앞으로도 죽 밝아 보입니다.

체스터 배리, 19 새빌 로, 런던, W1S 3PP

스콧(Nick Scott): 리포트 (Robb Report)영국판의 에디터이며, 레이크 (The Rake)의 전 편집장, 지큐(GQ) 오스트레일리아의 부편집장이다. 그는 런던에 살며 에스콰이어(Esquire), 가디언(The Guardian), 파이낸셜타임스(The Financial Times )에 특집 기사를 실기도 했다.